송가인과 춘천, 기억의 소환…'포로 이승만' 막았다6.25전쟁 사흘만 수도 서울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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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가인과 춘천, 기억의 소환…'포로 이승만' 막았다6.25전쟁 사흘만 수도 서울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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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6.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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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개전 이틀만 피난길
춘천서 6일간 방어 북한군 당초 계획 무산
장순휘 박사 "국가 운명 구한 구국의 대승"

  • 유경석 기자
  • 승인 2020.06.23 15:44
 
     
▲ 구봉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춘천시내 전경. 봉의산과 소양2교, 우두동 일원이 보인다. 사진=김현수 기자

[일간투데이 유경석 기자] 올해로 6·25전쟁 70주년을 맞는다. 국방부는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지구전투, 춘천지구전투를 6·25전쟁 3대 전승으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이중 춘천지구전투는 한국군의 한강 방어선 구축과 미군 참전을 위한 시간을 버는 데 기여했다. 특히 6·25전쟁 중 한국군 단독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다. 군인과 경찰, 시민과 학생이 함께 북한 최정예 부대를 상대로 승리한 춘천지구전투. 하지만 이를 기억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일간투데이는 춘천지구전투가 발생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6월 30일 오후 6시까지 전투기록을, 실제 현장 사진과 함께 취재·보도한다. [편집자 註]

[글싣는 순서]

1. 송가인과 춘천, 기억의 소환…이승만 피신 뒷이야기
2. 軍·警·民·學 뭉친 '구국의 항전'…춘천은 6일을 버텼다
3. "전쟁은 모두가 피해자"…춘천대첩의 교훈 '안보가 경제'


'미~~아리~ 눈물고개'로 시작하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송가인이 TV조선 미스트롯에서 부르면서 국민 애창곡으로 부활했다. 특히 '여보 당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세요'로 시작해 '여보~~'로 마무리되는 후렴구는 듣는 이의 눈물샘을 여지없이 터뜨린다. 1986년 12월생인 송가인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전쟁으로 애끓는 가족의 아픔으로, 전쟁세대는 물론 전후세대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며 세대통합의 아이콘이 됐다.

1957년에 발표된,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6.25전쟁 당시 어린 딸을 잃은 작사자의 경험이 창작 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아리고개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돈암동에서 길음동(吉音洞)으로 넘어가는 미아로에 있다. 돈암동~길음동~의정부~양주~동두천~연천~철원 축선이다. 옛날에는 되놈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에 침입해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단장의 미아리고개의 배경인 6.25전쟁 당시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이 고개를 넘어 북한으로 납치됐다. 송가인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70~90대 전쟁세대에게 당시의 아픔을 소환했고, 그들의 자녀인 40~60대에게는 부모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손자 세대인 10~30대에게는 이별의 아픔이라는 정서로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노래로 부활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8일 01시경 미아리 삼거리와 길음교를 잇는 서울의 최후방어선을 넘었다. 6월25일 04시 예비사격으로 시작된 전쟁 발발 만 2일 21시간 만에 서울에 진입한 것이다. 개전 이후 사흘만에 수도가 함락된 것은 수치로 평가된다.

서울 함락은 모든 시민들이 공산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끌려간 것도,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탄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시민들이 피난하지 못하게 된 1차적인 책임은, 한강대교 폭파를 지시한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있다. 물론 신성모 국방장관의 허언과 무능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이들을 임명한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 역시 작지 않다는 의미다.

 
6.25전쟁 발발 전 남북 군부대 배치현황. 자료=국방부

한강대교는 6월 28일 02시40분경 폭파됐다.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서고 1시간 40분만에 벌어진 일이다. 북한군 전차는 한강대교가 파괴된 후 9시간이 흐른 28일 22시경에 한강대교 입구인 이촌동 일원에 출현했다. 성급했다는 비판을 받는 까닭이다. 당시 한강(인도)교 위에는 500~800명의 피난민과 차량 50여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전열이 무너지면서 국군 총병력의 46%인 4만4000여명은 뗏목을 타고 도하했다. 전투부대와 전투지원부대의 중장비와 공용화기 70%를 버려야만 했다. 전쟁 초기 전투장비가 절대 열세했던 상황이라 피해가 더 컸다. 반면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폭파에 실패하면서 북한군의 도하공격에 이용됐다. 결국 서울 시민들은 피난 시기를 놓치면서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간 갖은 고초와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03시 경무대를 뒤로 한 채 피난길에 나선다. 27일 01시 열린 비상국회에서 수도사수결의안이 통과된 지 2시간만에 대통령이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6월 26일 심야에 열린 국방수뇌연석회의에서 결사항전을 결의한 지 하루 만의 일이다.

서울 시민들은 27일 06시경 정부의 수원천도 발표를 듣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길에 오른 지 3시간 후 시민들이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그리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한강대교는 폭파됐다.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총참모장 등이 포로로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강원도민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춘천시민들의 목숨을 던진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춘천지구 전투 또는 춘천·홍천지구 전투로 알려진 6월25일부터 6월30일까지 6일간의 전투가 그것이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04시 기습공격으로 시작됐다. 김일성의 목표는 8.15광복절 전까지 남한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전쟁 개시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고, 미군이 한반도에 증원되기 이전인 1개월 이내에 전쟁을 종결해 8월 15일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 서울에 통일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다.

전쟁 초기 전투는 서부지역 옹진반도, 개성·문산지역, 중서부지역인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 동부지역인 동해안(양양)지역 총 5개 지역에서 벌어졌다.

북한군의 제1단계 작전목표는 서울 점령과 국군 주력의 격멸이었다. 서부지역 옹진반도, 개성·문산지역, 중서부지역인 동두천·포천·의정부지역은 작전대로 진행됐다. 28일 01시 미아리고개를 넘어선 것이 그 증거다.

 
춘천시 근화동 소재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사진=김현수 기자

반면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 동부지역인 동해안(양양)지역은 예상 밖 상황이 전개됐다.

북한군은 춘천지역 전투에서 제2사단 포병사령관을 포함한 전사상자 6572명, 포로 122명, SU-76자주포 7대, 전차 18대 등 손실을 당하며 대패했다. 반면 한국군은 장교 8명을 포함한 200여명 전사와 전상 353명으로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한국군 제8사단이 방어한 동해안지역 전투 역시 연곡천과 사천일대에서 27일까지 강릉을 사수, 북한군 5사단의 남진을 지연시켰다. 한국군 8사단은 27일 오후 대관령으로 철수한 후 부대를 재편성하고 28일 강릉 탈환에 나섰다. 강릉부근까지 진출하던 중 육군본부의 철수명령에 따라 철수했다.

중동부지역인 춘천·홍천지역 공격에 나선 북한군 제2군단은 25일 내 춘천을 점령하고 수원방면으로 이동해 27일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 내 국군주력을 섬멸해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수원~원주~삼척을 잇는 제1단계 포위전략이다.

하지만 춘천·홍천지역 전투에서 6일간 북한군을 막아내면서 서울 외곽을 포위를 하려던 북한군의 당초 계획이 무산됐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정부는 안전하게 후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만약 북한군 계획대로 27일 수원이 점령됐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가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맥아더장군은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했고, 미국 제24사단 선발대인 제21연대 제1대대는 7월 1일 부산에 공수,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장순휘 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은 "6.25전쟁 개전일 춘천대첩(春川大捷)은 백척간두의 국가의 운명을 구한 구국의 대승이었다. 춘천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이 버텨주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패망했을 것"이라며 "북한군 제2군단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한국군은 초기에 대통령과 정부요인들 그리고 육군본부가 포로가 돼 항복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 사후평가"라고 말했다.

한편 2000년 6.25전쟁 제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춘천시 입구 소양강변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건립돼 구국투혼을 기념하고 있다. 특히 조형물에는 장병과 함께 싸운 경찰, 학생, 여직공, 시민이 표현된 민관군경의 총력전이었던 춘천대첩(春川大捷)을 담아 호국안보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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